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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2.01    [true1-1.hwp]
   우리역사를 왜곡한 일제만행의 실상.

우리역사를 왜곡한 일제만행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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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는 한국의 간도 땅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1661년 중국 땅을 제패했던 청(淸)나라 황제 강희제(康熙宰)는 1712년 조선 숙종 38년에 오라(길림)지방 총관 목극등(穆克登)을 변계(邊界) 사정관으로 임명하고 1712년 5월 15일 백두산 정상에 西爲鴨綠, 東爲土門(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의 비석을 세우고 청국의 국경으로 선포하였다. 이것을 소위 “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라 한다. 또한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1677년 이후 盛京(성경)변장 밖의 압록강과 도문강(圖們江) 사이의 광대한 장백산(長白山) 지구를 조종발상중지(祖宗發祥重地: 인류 문명의 중요한 발상지)로 규정하고 성경(盛京)의 동쪽과 이통주(伊通州) 남쪽과 도문강(圖們江) 북쪽을 모두 封禁地帶(봉금지대)로 선포하고 해당 지구 내에서의 거주와 개간, 삼림의 벌채, 광산물의 채굴, 인삼의 채취 등을 금지했다.


건융년간(乾隆年間)에는 7개 조항의 구체적인 봉금 조치를 취했다. 그 7개조를 살펴보면, ① 산해관(山海關)‧ 변문(邊門)‧ 해구(海口)에 대한 관리‧통제의 강화, ② 성경유민(盛京流民)의 철저한 조사와 무적(無籍) 유민의 회적(回籍) 조치, ③ 요심(遼瀋)의 경지에 대한 부단한 청장(淸丈)과 정돈을 통한 징세(徵稅) 조치, ④ 길림(吉林) 지구에 대한 봉금의 강화 ⑤ 광산물의 채굴 봉금과 관리‧단속의 강화, ⑥ 만인관직(滿人官職)의 설치를 통한 주현(州縣)의 치리(治理), ⑦ 만주족 구습속(舊習俗)의 회복 등이었다. 그 후 170 년이 흐른 뒤 1882년 청국의 길림장군이 우리 조정에 공문을 보내와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던 우리 조선국민을 소환해 가라고, 요구하고 1883년 토문강 서북 지방에 사는 한민족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조선인은 함경도 관찰사로부터 땅 소유권 문서를 발급 받고 지적부에 등기한 후 세금까지 내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간도 거주민에게 주권을 행사했다. 청국 측의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 우리 조정에서는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삼아 그 실정을 조사케 했다.

어윤중은 백두산 정계비가 있는 곳에 두 차례 사람을 파견하여 정계비 탁본(국립박물관과 백산학회에 소장되어 있다)을 만들고 토문강의 원류를 답사하여 간도 일대는 분명히 한국의 영토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국 측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므로 두만강 이북은 청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우리측은 두만강은 토문강이 아니라 송하강 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양국 간 주장이 서로 다르므로 1885년 우리측에서는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 조창식(趙昌植)이, 청국 측에서는 덕왕(德王)․매원계(賈元桂)․태영(秦煐) 등이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상류와의 연결지대를 공동 조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측 주장과 부합되었다.

즉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의 한줄기로서 두만강과는 완전 별개이며, 두만강의 발원처는 정계비와는 백 여리나 떨어진 곳이므로 정계비의 두만강을 우리나라 국경으로 절대로 정할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국측에서는 중국 발음의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토문(土門)과 도문(圖門)은 글씨 자체도 다르고 지도상에서도 엄연히 토문과 두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자 또 백두산 정계비를 우리나라 사람이 토문강 쪽으로 옮겼다. 라고 생고집을 부렸다.

1885년 을유년(고종 22년) 조선 정부는 두만강 이북 지역의 국경 확정 문제를 둘러싸고 안변부사 이중하를 감계사(勘界使)로 임명하였다. 우리나라의 이중하와 조창식이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보았더니,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이 처음 청나라가 믿었던 것과 달리 두만강과는 전혀 별개의 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된 것이다. 1712년 임진년(숙종 38년)에 청국에서 일방적으로 세워진 소위 백두산정계비의 西爲鴨綠東爲土門(서위압록동위토문)에 의하면 압록강-토문강-송화강-흑룡강이 우리나라의 영토이었던 것이다.

1887年 丁亥(정해:고종 24년) 中 . 朝 제 2차 회담에서, 이중하는 圖們(도문)과 豆滿(두만)이 동일 강임에 동의했으나, 土門(토문)과 豆滿(두만)은 동일 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국에서 西豆水(서두수)를 본 다음, 紅丹水(홍단수)를 경계로 정하자고 주장하다가 石乙水(석을수)로 다시 주장하였으나 이중하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내 머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국토는 축소시킬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吾頭可斷 國疆不可縮).

1887년 정해년에 우리측에서는 홍토수(紅土水)를 주장했고 청측에서는 서두수(西豆水)를 주장해 소위 丁亥談判(정해담판)도 결렬되었다. 조․청 양국은 1885년(을유 담판)과 1887년(정해 담판)두 차례에 걸친 간도 영유권 문제로 인한 국경 협상을 이른바 '감계 담판(勘界 談判)'이라 한다. 두 차례의 담판에도 불구하고 간도 지역을 둘러싼 조선과 청국 양측의 협상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1894년 고종 31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 간도영유권 문제는 중단되었다.

청․일전쟁(1894~1895년)의 결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과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 갖가지 이권을 획득하고 한국의 금 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후 한국의 영토이었던 간도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에 대해 철수요구를 하는 등 한국의 만주와 간도 땅을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896년 조선 고종 재위 34년에 국호를 大韓帝國(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光武(광무)로 하였다. 광무 7년(1903) 4월 러시아군이 마적과 함께 한국의 땅 간도와 滿洲(만주)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자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1904년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한국의 간도 영토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1904년 2월 8일 여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1904년 2월 10일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한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서울로 입성하여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간도>영토를 보전한다고 보증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 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은 1904년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고,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켰다.

1904년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함으로서 일제는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 시작되었다. 한편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하고 결국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점령하는 월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을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을사보호조약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토와 하야시를 통해 신협약안을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전달되었다.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와 함께 고종을 3차례에 알현하였다.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신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5시간이나 계속 강요하였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수십 명의 일본 헌병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위협하며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ꡐ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ꡑ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고 한규설 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든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신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조인 체결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통감부는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3권을 장악하여 관헌의 감독권, 병력동원권, 또한 조선의 시정 감독, 어떠한 정책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감독기관으로 군림하며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1906년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조선통감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간도(間島) 주재 한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통감부 파출소(統監府派出所)를 설치하고 일본은 간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및 복리증진을 위해 그 직책을 다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간도의 가정(假定)경계선을 책정하고 청나라의 간섭에 무력으로 대항할 것도 사양 않을 태세였다.

그 당시 일본은 만주문제에 관하여, ① 안봉선(安奉線)의 개축문제 ② 푸순[撫順] 및 옌타이[煙臺] 탄광의 환부 ③ 잉코우지선[營口支線] 철퇴의 요구 ④ 관외철도(關外鐵道)의 파구먼[法庫門] 연장 등으로 청과 일본 사이에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안봉선 개축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내자 청은 한국의 땅 간도 영토를 양보하면 다른 모든 현안은 일본의 주장에 응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한 일본은 즉각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고대부터 한국의 영토이었던 간도(흑룡강성)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 협약의 전문은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 ․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 경계를 이루되, 도문강(두만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과 청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 ․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국 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 ․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1909년 순종 3년에 대한제국의 국권과 영토를 강탈한 도적 일본이 우리나라의 간도 땅을 자국의 영토 인 것처럼 일본과 청국 사이에 전문 7개조의 간도협약 [間島協約]을 체결함으로서 간도 땅은 청(중국)에 귀속(歸屬)되고 중국과 한국의 국경이 두만강으로 정해져 오늘날 한국의 영토는 반도로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이 간도협약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간도[間島]
간도 땅은 청나라에서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 ·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중국 동북 지방 길림성 동남부에 있는 지역을 간도(墾島), 간토(艮土), 북간도라고도 한다. 한(韓)민족 자치주가 설치된 길림성, 랴오닝성, 헤이룽성 일대에 걸친 지역으로 서간도와 동간도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 간도라고 할 때는 동간도를 가리킨다. 남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며, 동으로는 연해주와 접해 있고, 남서쪽으로는 장백 산맥이 뻗어 있으며, 북쪽과 서쪽은 대려령, 노야령, 장광재령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약 2만 1, 000㎢이고,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다. 주민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임업이 성하며, 석탄, 구리, 납 등의 광물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현재 약 9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발해가 망한 뒤에는 여진족이 살면서 조선 초기까지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들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중국 본토로 들어감에 따라 이 곳이 비게 되어, 조선의 이주민이 들어가서 미개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강희제는 처음에 조종발상중지(祖宗發祥重地: 인류 문명의 중요한 발상지)로 규정하고 성경(盛京)의 동쪽과 이통주(伊通州) 남쪽과 도문강(圖們江) 북쪽을 모두 封禁地帶(봉금지대)로 선포하여 이 곳에 주민의 거주를 금하였으나, 산둥 지방으로부터 이주민이 몰래 들어감으로써 조선 이주민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1712년(숙종 38년)에 백두산 분수령 위에 정계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우리 겨레의 이주민이 늘어 그 곳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꾸미자, 청나라는 간도 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조정에 한민족 철수를 요구하여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삼아 이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겨 회담을 결렬시키면서 간도의 소유권을 계속 주장했다.

그 뒤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보내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포함시켜 관리하게 하는 한편, 포병을 기르고 조세를 받아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여 자기들이 관리한다고 하며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1909년(융희 3년)에 간도협약을 맺고 만주(중국 동북 지방)에 안봉선을 건설하는 권리를 얻어 내는 대가로 한국의 영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푸순 [撫順(무순), Fushun]의 면적 1만 800㎢, 인구 227만 명(1998)이다. 요하[遼河]의 지류인 훈허강[渾河]의 중류 남안에 있으며 심양[瀋陽] 동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다. 한(漢)나라 때에 이미 원시적 취락이 존재하여 한민족의 동방 진출의 거점이 되었으며 명(明)나라 때에는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에 푸순 탄광의 채굴이 개시되면서부터이며, 러·일전쟁 이후 노천굴에 의한 채광 확장과 더불어 1924년 구시가(舊市街)의 동쪽에 신(新)시가지가 건설되면서 근대도시로 발전하였다. 푸순 탄전은 중국 최대 탄전의 하나로, 최근에는 5개 광구로 확장되었으며, 심양 ·안산[鞍山]·뤼다[旅大] 등지에 공업원료탄 및 철도용탄을 공급하고 있는데 대량의 유모혈암(油母頁岩)도 함께 생산된다.

심양[瀋陽]의 면적은 8,515㎢, 인구 386만 명(1998)이다. 옛 이름은 봉천(奉天), 만주어명은 무크덴(Mukden)이다. 동북[東北] 지방 최대의 도시로 이 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동북 남동부의 노년기산지 말단부가 평야와 접하는 요하[遼河] 유역에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개발되어 한대(漢代)에는 요동군(遼東郡)에 속했고, 뒤에 고구려의 영토에 속해 있다가 다시 당(唐)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심주(瀋州)가 되었다. 그 후 발해(渤海)에 속했다가 요(遼)·금(金)시대에는 동경로(東京路)이고, 원대(元代)에는 심양로(瀋陽路)가 설치되었고, 명(明)은 변경의 요지로 삼아 심양위(瀋陽衛)를 두었다. 청조(淸朝)가 일어나자 1625년 요양[遼陽]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경(盛京)이라 개칭하였다.

1644년에 베이징을 국도로 정한 뒤에 이 곳을 배도(陪都)로 삼고, 1657년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19세기 말에 러시아와 일본의 동북[東北] 침략이 시작되자 선양은 침략의 목표가 되고, 러.일[露日戰爭:1904∼1905] 때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청조가 멸망하자 동북 지방 군벌(軍閥)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고, 선양은 그 두목 장작림(張作霖) 정권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2년에 일본에 의해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면서 도시명이 봉천시(奉天市)로 개칭되었다. 그 후 일본의 동북지배의 주요기지로 발전하여 만주국 제1의 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만주국이 붕괴되자 지명이 다시 선양으로 바뀌었으며 장춘[長春]·대련[大連] 산해관[山海關] 단동[丹東] 길림[吉林]으로 통하는 주요철도가 분기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근에 푸순탄전[撫順炭田] 및 본계[本溪]·안산[鞍山] 등 탄전·철산이 있어, 기계·전기기기·기관차·자동차·착유(搾油)·제분·방적·화학 등의 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부근 일대는 중국 최대의 중화학공업지대가 되어 있다. 시가지는 동부의 고궁을 중심으로 성벽에 둘러싸인 구성내(舊城內),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서부의 상가·주택가·문교지구, 중간의 관청가, 장춘 대련 철도 서쪽의 공장지대 및 노동자 주택지구와 제2차 세계대전 후 북·동·남부로 확산된 신시가지 등으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