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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2.13   
   일본은 대한제국의 동북삼성을 중국에 넘겼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동북삼성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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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사건[柳條溝事件]으로 비롯된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만주(지금의 중국 둥북 지방)에 대한 침략전쟁을 만주사변이라 한다. 만주에는 러 ·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특수권익이 있었으나,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소련이 1928년부터 추진한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이 관동군을 자극하여,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대좌 등이 중심이 되어 전 만주를 점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奉天:瀋陽) 외곽의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일으킨 집단으로 당시 펑톈군벌 장쉐량[張學良] 정규군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고 펑톈군 공격 명령을 내려 장쉐량 군이 주둔하고 있던 북대영(北大營)을 포격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만철 연선(沿線)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1932년 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중국측의 제소(提訴)에 따라 국제연맹은 리턴조사단(조사원 구성: 단장 영국의 리턴경(卿) 이하 이탈리아의 알드로반디 백작, 프랑스의 H.클로델 중장, 미국의 F.R.맥코이 소장, 독일의 H.슈네 박사)을 파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성[熱河省]을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러한 침략행위는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의 동북 3성(요녕遼寧), 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黑水(흑수]의 3성(省)에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중국에 21개조를 강요하였다. 이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성은 영국·미국의 반발을 초래하자 일본은 워싱턴회의로 인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 요구를 계기로 중국과 조선국은 합동으로 반제국주의적 민족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각국은 대공황대책에 부심하고 있었으며, 국제연맹도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미국은 무력에 의하여 현 상태를 변경하는 것은 승인할 수 없다(불승인주의)고 선언하였을 뿐이고, 영국은 그것마저도 지지하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와 아랍의 민족운동에 시달렸고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 격화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영국·미국의 사실상의 묵인을 얻게 되자 일본의 군부 및 제국주의세력은 이를 이용, 군국주의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일본군의 화베이 침략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1935년 8월 중국공산당은 모든 동포에게 고하는 8·1선언을 발표하여, 내전을 중지하고 모든 힘을 결집시켜 항일구국 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였지만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1936년 12월 장제스[蔣介石]가 공산주의 소탕작전의 독려를 위해 시안[西安]에 들렀을 때 장학랑[張學良]은 장제스를 체포한 소위 서안사건(西安事件)이 일어났다. 중국공산당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중재로 장제스에게 내전중지·국공합작·무장 항일을 승인하도록 요구했다. 이리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군부는 화베이의 병력을 늘리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을 계기로 중·일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 무렵 유럽이나 미국의 관심은 에스파냐에 집중되어 있었고, 영국은 독일의 위협에 직면하여 일본에 대해서는 유화정책을 취했다. 미국에서는 고립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는 가운데 [불승인주의]의 원칙은 희미해져 갔다. F.D. 루스벨트대통령은 1937년 10월 5일 시카고에서 행한 연설에서 독일·일본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그 두 나라를 격리시킬 것을 강조했으나, 국내에서는 고립주의의 강화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1937년 11월의 브뤼셀9개국조약회의에서 중국대표가 일본에 대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호소했으나, 영국·미국·프랑스는 소극적 태도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3월 1일에 만든 만주국은 조선국의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의 3성(省)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주국 성립 후에는 중국의 러허성[熱河省]도 판도(版圖)에 넣고, 1940년은 18성으로 행정구획을 나누어 다스렸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의 영토인 요둥반도[遼東半島]를 할양(割讓)시켰는데 러시아 등의 3국 간섭으로 결국 한국의 영토이었던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고 말았다.

그 후 20세기 초에 제국주의의 시대로 들어가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이 벌어졌으며, 일본은 관둥저우조차지[關東州租借地]와 창춘[長春]에서 뤼순[旅順]간 약 735㎞의 철도 및 그 부속이권을 획득하였다. 1906년에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철도와 푸순[撫順]·옌타이[煙臺] 등의 탄광의 경영과 동시에 철도부속지의 일반행정권을 부여받았고, 철도 10㎞에 15명의 주병권(駐兵權)을 얻어 마치 만주 속의 일본 독립국을 설립하였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와 28년 관동군에 의한 장쭤린[張作霖] 폭살사건 등 일본의 만주에 대한 요구는 점짐 더 커져 갔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 중앙과 관동군은 계획대로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만철선로폭파사건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장쉐량[張學良]의 숙영(宿營)인 북대영(北大營)과 펑톈성[奉天城]을 공격하게 되었고 다음날 만철연선(滿鐵沿線)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또한 관동군의 지린 공격을 구실로 허술해진 펑톈 방면에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조선군사령관이 조선군(일본의 조선주둔군)을 독단적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관동군은 남만주 점령 후 다시 북만주의 치치하얼[齊齊哈爾]·하얼빈[哈爾濱]을 공격하였고, 만주의 군벌(軍閥) 마잔산[馬占山]의 저항 등에 직면하였으나, 1932년 북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여 만주 전체를 지배하였다.

한편 사건의 중심인물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등 관동군의 장교들은 류탸오거우사건 직후부터 당초의 만주에 대한 군사점령이라는 구상을 변경하여 괴뢰국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혁명(國民革命)에 부정적인 만주군벌(滿洲軍閥)의 시챠[熙洽], 장징훼이[張景惠]·창스이[臧式毅] 장하이펑[張海鵬]·간츠산[干芷山]·마잔산[馬占山] 등에게 강요하여 각 성(省)을 독립시키고, 1932년 3월 1일에는 그들이 조직한 둥베이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에 의한 <건국선언(建國宣言)>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톈진[天津]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데려와 3월 9일 푸이의 집정(執政) 취임식이 거행되어 <만주국>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만주국의 주권은 집정에게 있었으며 헌법은 없고 정부조직법이 이를 대신하였다. 입법·행정·사법·감찰의 4권 분립제였으며 집정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가 있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행정권이 강력하였고 행정의 중심은 국무원(國務院)이었으며 수반은 국무총리였다. 집정에 대한 보필의 책임은 국무총리 한 사람만이 지고, 국무원 예하의 각 부총장은 소관사무에 대한 행정장관이었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권한이 큰 편이었으며 이 국무총리의 참모적 지위에 있는 총무청(總務廳)으로서 총무장관이 국무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인사·회계·조달 등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총무장관에게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총무청 중심주의라 불렀다.

총무장관에는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총무청 내의 각 처장과 행정 각부의 차장 이하의 일본인태평양전쟁에 의하여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 원료의 생산확대가 불가피하여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탈적 요소가 더욱더 증대하였는데 이 협화회가 수탈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43년 봄 이후부터 관동군은 병력을 남방 각 지역과 본토작전에 전용(轉用)하며 약체화(弱體化)되었으며, 45년 8월의 소련 참전은 당장에 <만주국>을 붕괴로 이끌어, 그 해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괴뢰국 만주국을 해체하고 사실상 관리로 감독하게 하였다. 관동군은 4000만 이상의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民族協和)>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이라고 부르짖었다. 또한 1932년 7월에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발족시켜 중국과 한국 민중 지배의 첨병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