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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1.25    [true 3.hwp]
   黑水(흑수)와 백산은 우리민족의 발상지이다.

黑水(흑수)와 백산은 우리민족의 발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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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는 고대 우리나라 환국의 환인과 배달국의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개국한 지역이며 인류문명의 발상지이다. 즉. 환국, 배달국, 조선 삼한의 진한 지역이며, 북부여, 고구려, 발해의 땅이며 고려의 영토이었다, 조선 시대 전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여진족과 거란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나 이후 우리 민족이 이주해 개척을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땅의 주인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현장이었다.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 연변조선족자치주 ”가 설치되어 있으며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전체의 약 40%인 80여만 명에 달하고 나머지는 한족-만주족-회족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韓國史속의 黑水(흑수:흑룡강성)]
[삼성기전 상편, 환단고기] 어느 날 桓因(환인)이 童男(동남) 童女(동녀) 800명을 거느리고 黑水(흑수:흑룡강성)와 白山(백산:天山(천산)사이에 내려오시어 부싯돌로 불을 일으켜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이 나라를 桓國(환국)이라 하고 이 분을 천제 환인이라 불렀다. 또한 安巴堅(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환국은 제 7대를 전하였으나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환국의 뒤를 天神(천신)들의 뜻을 받들어 환웅천왕이 계승하고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오시어 子井(자정)과 女井(여정)의 샘을 天坪(천평)과 靑丘(청구)에 만들었다. 환웅천왕은 天符印(천부인)을 가지고 곡물,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주관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道理(도리)를 교화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게 하시어 인간 세상을 널리 유익하게 하시었다. 또한 도읍을 神市(신시)에 세우고 倍達國(배달국)이라 칭했다.

삼국사기 -50권-열전10-甄萱(견훤)의 본문에서 서기 936년 태조는 尙父(상부) 견훤과 병력을 검열하고 大相(대상) 견권, 술희, 금산과 장군 용길. 기언, 등에게 보기 병 3만 명을 左翼(좌익)으로 삼고 大相(대상) 김철. 홍유, 수향과 장군 왕순 준량 등은 보기병 3만 명을 右翼(우익)으로 삼았다. 大匡(대광) 순식과 太相(태상) 긍준, 왕겸, 왕예, 검필과 장군 정순, 종희 등은 鐵甲(철갑) 보병 2만 명과 기마병 3천명 및 黑水(흑수:흑룡강)와 鐵利(철리)와 여러 道(도)의 강건한 기마병 9,500 명을 中軍(중군)으로 삼았다.

7천만 한겨레여...!
黑水(흑수)와 鐵利(철리)와 여러 도의 강건한 기마병 9,500명은 어느 나라 군사들인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黑水(흑수)와 鐵利(철리)에 대한 註(주)가 없다. 대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상기와 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이 한반도 지형에 맞춰지지 않거나 납득 할 수 없는 지명에 대해서는 억지 주장을 펴거나 註釋(주석)을 피하고 있다. 동북에 위치한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의 3성은 아득한 옛적부터 우리 대한민족의 혼이 서려있는 聖地(성지)이다. 정부당국자는 이 땅 만은 반드시 되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3, 잃어버린 한국의 땅 두만강 녹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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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되고부터 외국과 조약을 맺을 수 없었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는 현재 러시아령으로 돼 있는 이 땅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원로 지리학자 서무송씨는 최 근 발간한 저서 「지리학 삼부자의 중국지리 답사기」(푸른길刊)에서 근거를 하나 하나 들어가며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연합뉴스 2004년 7월 15일 임형두 기자 보도 참조) 녹둔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은 사료에 많이 나와 있어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조선조 세조 원년인 1455년에 '녹둔도' 또는 '녹도'(녹야원)로 불렸고, '조선왕조실록' 에만 녹둔도 기록이 12번이나 나온다. 조선 후기의 고지도나 향토지에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충무공 이순신은 함경도 경흥부 에 속하는 이 섬의 조산만호(造山萬戶)로서 둔전을 관리했던 것이다. 1587년 발생한 여 진족의 녹둔도 공격사건 때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나서 여진족을 격퇴했다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해임된 곳이 바로 녹둔도였다.

이 섬이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때는 1860년(철종11년). 제정 러시아는 청의 국력 이 쇠한 틈을 타 국경획정을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이해 베이징(北京) 조약 체결로 녹둔도는 우리도 모르게 러시아 영토로 둔갑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선은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을 현지로 보냈다.

어윤 중은 "녹둔도는 모래가 쌓여 러시아 땅에 연접해 있으나 본래 우리 땅이었으며 섬 주민 또한 모두 우리 백성으로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라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말 지명이 사용됐으나 이후 점차 사라지고, 러시아어 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1937년 연해주의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두만강 하류의 델타 지역은 텅 비었다. 문제는 두만강의 토사가 밀려오면서 퇴적을 거듭해 녹둔도가 러시아 쪽으로 붙어버렸다는 점이다. 충적평야인 녹둔도 일대는 특성상 자연스럽게 러시아 쪽의 땅과 육속되면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물길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즉, 기존의 북쪽 물길이 계속 퇴적해 육지가 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 녹둔도가 우리 영토라는 목소리가 제기된 것은 1972년. 동국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던 박태근씨가 장서각에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를 찾아내면서부터이었다.

박씨는 한 신문 기고에서 아국여지도 옆에 '녹둔도는 남북으로 28km, 동서로 2k m, 우리 거민 113호에 822명이 거주하며 농토는 비옥하다'고 기재돼 있다고 밝혔다. 이 지도는 1884년 고종이 파견한 조선관리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1984년 말에는 북한과 소련이 국경 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었지만 녹둔도 문제는 이렇다할 성과 없이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에도 우리측이 서울 주재 러시 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2000년 가을에는 서울대 지리교육과 이기석 교수진이 현지탐사를 시도했으나 군사기밀 지역이라는 이유로 탐사시간이 3시간으로 제한된데다 갈대의 키가 2m에 이르는 등 현지의 악조건 때문에 별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서씨는 "19세기 중기에 제작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녹둔도가 엄연히 우리 영토로 들어가 있는 등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문헌에 등장 한다" 며 강한 애착을 보였다. 1927년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태어난 서씨는 두만강 사구지대를 보 며 젊은 시절을 보내 녹둔도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깊었다.

4, 중국의 동북공정은 간도영유권 제기의 대비책이다.
한국의 정부당국자는 중국의 동북공정의 본질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중국이 한국 고대사 빼앗기 공작'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공작이 동북공정의 본질이 아니라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예견한 것과 같이 남북통일 이후에 한. 중 사이에 반드시 제기될 “ 간도 영유권 반환 소송 ”에 대한 대비책이 동북공정의 본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의 본래 핵심 취지에서 벗어나 현재 중국 영토를 근간으로 고대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우리나라의 고대, 중세, 근세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켜야 된다는 결론을 얻고 [중국의 국사교과서 개편] 작업을 추진 중에 있는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국의 역사를 수시로 변조했으므로 약소국의 항변으로 결코 중단하지 않고 국사교과서를 개편 할 것이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현실적으로 결국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 간도영유권 반환 소송 ”을 제기하여 해결될 수밖에 없다. [지도는 조선 13도 중의 북방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