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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2.13   
   반도 조선사 이렇게 만들어졌다.


◆, 일제는 조선 삼한의 사료 20만 권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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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한국의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등 금 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후 한국의 간도 땅을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철수 할 것을 요구하는 등 한국의 간도 땅을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896년 조선 고종 재위 34년에 연호를 光武(광무)로 정하고 국호를 大韓帝國(대한제국)으로 정하여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광무 7년(1903) 4월 러시아군이 마적과 함께 한국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국제적 긴박한 상황에서 1904년 1월 23일 한국 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1904년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한국의 간도 영토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1904년 2월 8일 여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1904년 2월 10일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입성하여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의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하였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간도의 한국 국민들을 보전한다고 보증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 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끝나자 대한제국은 1904년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고, 동시에 러시아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1904년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함으로서 일제는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 시작되었다. 한편 190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 회담에서 전문 15조와,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어 결국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점령하는 월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 :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일본은 조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조선의 관헌감독권, 병력 동원권 등 국정 3권을 장악하여, 명실 공히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908년 미국은 일본의 한국병합을 승인함으로써 조선은 식민지로 전략되었다. 1910년 일황 칙령(勅令) 제 319호로 통감부의 이름을 고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총독부에 취임하였다.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 국민을 일본인으로 동화하여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유구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왜곡 조작하여 한민족정기를 말살하는 과업을 제1 국책으로 삼고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서적을 색출해서 단군조선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불태워 없애고 한국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전초작업에 착수했다.

1915년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반도조선사 편찬과』를 설치하고 일인 역사학자와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등 역적을 임명하여 한국의 역사 왜곡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다는 미명으로 조선 사람을 일본 사람으로 동화시키는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1922년 12월 훈련 제64조로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새로 제정, 공포하여 다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등 8명의 관계자들이 연 122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중국 대륙 각처를 누비며 조선 사료를 찾아내고 심지어 한국의 역사적 증서가 될 [광개토대왕 비문]과, [모두루 비문] 등 모든 비문의 글자마저 훼손시키고 돌아왔다.

1925년 6월 일황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 관청으로 승격시키고 [조선사편수회]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총독은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중국 전역에 파견했던 일인 학자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한편 한국의 전국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했다. 초기의 조선 관계 자료의 수집은 강제 수색․압수가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한 자료를 수집하지 위해서는 대여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훈시하고 조선 반도사 편찬지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 삼한, 삼국, 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조선총독부는 상기와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가장 공명 정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혀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했다. 겉으로는 사료 수집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한국의 역사는 물론 전통문화, 예술, 인물,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 등 심지어 조선어 국어 교과서까지 전부 압수하여 제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가 오히려 더욱 늘어났던 것이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끌어내려 「신라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조선왕조 실록」, 제6편 「조선시대후기:조선왕조 실록」으로 정하고 편수마저 7편에서 6편으로 1편을 줄이기로 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6편으로 줄인 것은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의 시대구분 문제는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조선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고 끈질긴 공방전을 낳았다. 조선사편수회의 회의록 중에 1928년 7월 18일 중추원에서 열린 고문․위원간담회의 주요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山梨 총독 : 앞서 본회가 조선 사료의 수집․정리와 조선사 편찬의 사명을 가지고 창립되자 고문과 각 위원들은 그 취지를 열열이 원조하고 각 직원들은 근면히 사무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인멸되어 가는 사료를 수집하여 공정한 조선사를 만들려는 것은 본회 창립 당시에 비하여 더욱 절실한 소망일 뿐 아니라 조선 통치상으로 보아 긴요한 일로 믿는다. 여러분은 더욱 노력하여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해 달라.

◆ 池上정무총감 : 본회 사업의 경과를 보면 사료 수집은 예정의 절반은 완료하였다. 이것은 여러분들과 일반인들이 귀중한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참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1-2년이면 일반 수집을 마칠 예정이니 여러분은 물론, 일반인들도 더 한층 편의를 제공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黑板勝美 : 나는 다행히 여기에 참석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조선사 편수에 나는 처음부터 관여하여 상담에 응해 왔다. 최초에는 10개년에 역사 편찬을 완성하기로 하였으나 [1919년 조선의 3.1 독립운동]과 1923년 일본의 진재(震災) 때문에 편찬사업이 연장하여 12년간에 전부 완성하기로 했다. 사료는 각 도, 각 지방에 있는 것은 물론 일본, 지나(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여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편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원과 고문 각위의 협력으로 벌써 사료 수집도 과반을 마쳤으므로 편수의 체제와 강령을 정하고 그에 따라 편찬을 진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무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단계에는 여러분의 기탄없는 의견을 듣고자 하나 실은 자료가 너무 호한하고 그 수집 정리 및 편찬에 대해 수사관도 상당히 곤란을 받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분히 연구하여 우선 편찬이 완성한 다음에 심사를 앙청하기로 하겠다. [1930년 8월 22일 오전 9시 중추원 제5회 위원회의 회의록은 다음과 같다.]

◆ 최남선 : 편수에 관하여 질문이 있다. 첫째 제1편의 편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요람에 의하면 「신라통일 이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심히 막연하다. 무릇 반도 안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역사상 밝혀진 것은 어느 정도까지 채택 할 것인가? 견해에 따라서는 종래 반도사에서 제외된 것이라도 반도에 심히 복잡한 관계를 가진 민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는 제6편은 조선의 갑오개혁까지 편수한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것이라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룰 작정인가?

◆ 今西龍 : 제1편에 관해서는 담당자인 내가 말하겠다. 무릇 고대 역사를 수찬함에 있어서는 「민족」을 위주로 하느냐, 「토지」를 위주로 하느냐? 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따라서 주된 민족의 흐름의 관계가 있는 한, 또한 그 설명 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주변 여러곳의 기사도 당연히 채택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같은 나라는 그 지역이 반도 밖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물론 채입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 최남선 : 구체적으로 말하면 숙신(肅愼)같은 것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나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이후에 내려와서 발해(渤海)의 역사도 조선사에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 今西龍 :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발해는 조선사와 관계가 없으므로 발해 역사는 생략하겠다.

◆ 최남선 : 참고로 말하겠다. 무릇 고대사는 「민족」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본위 또는 「문화」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이겠으나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전력을 다 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고대 민족에 관한 사료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중국)의 여러 사적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므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까지도 면밀하게 조사하여 오류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조선 민족은 인류학 상으로도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선의 민족문화를 밝히기 위해서는 차라리 동방 제 민족의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정리해 주기를 바란다.

◆ 今西龍 : 최위원의 말에 대해 담당자로 깊이 감사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사료」와 「사설」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료」는 될 수 있는 대로 수집하겠으나 「사설」을 수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2, 1932년 일제가 우리 국사(조선사)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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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처음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편찬은 중요하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은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의를 열겠다고 계획되어 있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1932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35권의 「조선사」가 편찬되었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 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이전) 1, 2권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이 1932년 3월 31일 출간되었다.

[조선왕조 실록]은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일제가 만든 조선왕조 실록)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제6회 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조선사의 첫 3권이 나온 약 4개월 후인 1932년 7월 21일이었다. 사전 원고의 협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분노한 육당 최남선은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3. 일제는 桓國(환국)을 桓因(환인)으로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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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남선 : 原典의 인용이나 고감(故勘)에 있어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賤人)의 망필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고의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부터 수상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 글은 경도대학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나 그 원서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여 '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스럽게 개찬하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 제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 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있어야 될 줄 안다.

이상 지적한 몇 가지는 잠깐 동안 발견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제6회 위원회에서 「삼국유사」의 개찬을 지적, '천인의 망필'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육당의 지적은 「삼국유사」 정덕본의 正本이 발굴되어 今西龍 등 일본인 학자들이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하게 되었다. 今西龍은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교수를 따라와 반도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며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硏究)」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 [昔有桓國是謂天帝桓因]을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던 것이다. 즉 '옛날에 있었던 환국(桓國)의 천제 환인의 기사를 환국을 삭제하고 환인으로 바꾸어 고조선의 입국(立國)사실을 삭제하고 환인과 환웅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하고 단군(檀君)도 '壇君'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즉 일제는 한자를 빼거나 더하여 조작했던 것이다. 최남선이 단군고기(檀君古記) 중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원문을 今西龍에게 지적하고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이 뒷받침하고 있다. 라고 지적하였다. 일제의 今西龍이 고친 삼국유사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1934년(소화 9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 육당 최남선은 단군과 기자에 대하여 추궁하였다.

◆ 최남선 :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 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 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 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황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 때에 이(檀君(단군)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를 외사(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편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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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 7회 회의 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흑판고문이 당시 한 말이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사료 중에 세상에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책명이 있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 군문등록(軍門謄錄)》등이 있다. 하고 이 책부터 먼저 출간해야 한다." 라고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黑板勝美가 각 위원들에게 조선사 목록을 나누어 주고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때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하기를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내용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일본이 고의적으로 조작한 사실을 뜻하고 있다. 즉 이미 조작한 삼국사기의 지명을 임진왜란의 침략 경로에 넣어 마치 임진왜란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어 난 것처럼 조작하였던 것이다.

즉 일제의 今西龍이 이미 삼국사기의 현재 지명을 한반도에 맞추어 모두 왜곡된 지명을 한민족이 믿을 수 있게 세뇌시키기 위하여 임진왜란을 조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1923년(대정 12년)부터 1937년(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의 총목록 종류가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씨가 저서하고 1981년 4월 25일 발행한 [역사와 현대]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 라고 밝혀져 있다.

[반도조선사편수회]의 마지막 회의인 제9회 위원회는 1935년(소화10년) 7월 5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렸다. 그때 今井田 정무총감의 개회인사에 이어 稻葉岩吉의 간사가 보고하기를 "단군 기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회의 처음부터 논의가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의 기사를 검출하여 단군에 관한 고래의 문헌을 채록했다. 이 부분은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배본을 마쳤으므로 여러분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의 稻葉岩吉의 간사가 보고한 '조선사'에 단군을 수록했다는 부분은 백문보의 상소문에 나온다. "백문보(文寶)의 상소하여 말하기를 국가, 사직과 세수(世守)와 문물예락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왜구의 대란이 일어나고 홍건적이 왕도(王都)를 함락하여 왕가가 남천(南遷)하였으니...대저 천수(天數)에는 순환의 이(理)가 있다. 7백년으로써 일소원(一小元)하고 3천6백년으로 대주원(大周元) 한다. 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이미 3천 6백년이 되었으므로 이는 곧 대주원의 운이 다시 돌아오는 때이다." 故 문정창은 '조선사' 3편 7권 백문보의 상소문 말미에 있는 '단군' 2자가 '조선사' 35권, 총 2만 4천여 쪽에 나오는 단군 기술의 전부라고 지적하고, 통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총목록, 총색인 각 1권, 본문 35권 총 2만4천1백11쪽, 도판 395매로 완간되었다. 그 외 [조선사 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 집진(集眞) 3질]은 예정보다 늦은 소화13년(1938년) 3월에 완료되었다. 사료 수집기간을 제외하고도 만 16년이 걸려 우리나라의 국사를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은 엄청났다. 초년도(1922년)에는 연간 예산이 1만7천6백40원에 불과했으나 다음해부터 계속 증액되어 약 1백만원이란 거액을 투입했다.

[고려사절요 24권]은 조선총독부의 별도 예산을 받아 출간했다고 한다. 일제는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 간 중국 전역은 물론 한국 전역에 산재한 고조선 삼한의 고사서를 수집하여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는데 그 증서로 필요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서적만 남기고 모두 다 불태워 없애고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흔적을 말살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첫째는 한국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속의 소국으로서 대국 중국을 섬기며 조공을 받치는 “ 사대성이론 ”이며 둘째는 일본의 간섭 없이는 문명이 발달 할 수 없는 “정체성이론”이었다. 즉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핵심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 정당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1938년(소화13년) 3월에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우리국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해적이 우리나라 역사(국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