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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12    [true 6.hwp]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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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陰謀(음모)에 따라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의 우봉(牛峰) 이씨이다. 1907년에 열두 살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온 이병도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이완용과 이병도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뇌리에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들어가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이병도는 이케노우치(池內宏)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 민립대학이 설립되자 일본은 경성제대(서울대)의 문을 열어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ꡒ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왕의 음모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즉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일제의 음모에 동조하여 당시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사 편수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낸 일본 학자의 학설에 합리화하고 역사왜곡에 일조했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과,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이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이고 이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이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과 손진태, 홍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어용 학술단체기관지의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 학술지의 [조선사학] 주필이었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이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이병도(李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였다. 1938년(소화13년) 3월에 [반도조선사]가 완료되자 진단학보는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되었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던 이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파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이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되었으나 결국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한민족의 반역자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6․25전쟁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이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이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같은 해 이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이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고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이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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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우리나라 환국시대 3,301년 -배달국시대 1,565년 -조선국 삼한시대(진한, 마한, 변한) 2,096년과 동북부여시대 204년 도합 7,166년의 역사를 말살하고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변조하여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의 속국이라고 왜곡하여 편찬된 책이 바로 [반도조선사]이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우리나라 고조선 삼한의 정통 역사는 없애버리고 마치 衛滿朝鮮(위만조선)이 우리나라를 계승한 정통 조선국으로 날조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 삼한의 제 74대 번한왕 기준(箕準) 재위 28년(BC 194)년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니, 조선 삼한의 번한은 망하게 되었다. 기준이 위만에게 왕위을 빼앗기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마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이를 기씨 마한이라 한다.

마한의 기준이 도읍을 금마(金馬: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으로 정하였다. 계유(BC 108년)에 漢(한)의 劉撤(유철)이 右渠(우거:위만의 손자)를 멸망시키고 한무제(漢武帝)는 한반도 내에 漢四郡(한4군)을 설치하고 조선은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에 한국의 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신석호,홍희(洪憙)등은 일왕에게 충성을 더 높이기 위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의 지명을 한반도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고 자기 임의대로 註釋(주석)하여 마치 4국이 한반도 내에서 건국된 것처럼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그야말로 이름과 같이 ≪반도 조선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1934년(소화 9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 육당 최남선은 숙신(肅愼)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나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발해(渤海)의 역사도 [우리] 조선사에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今西龍이 대답하기를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발해의 역사는 조선사와 관계가 없으므로 발해 역사는 생략하겠다. 이로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발해 역사를 우리역사에서 삭제했다. 만약에 발해 역사만 우리 역사로 인정하고 국사교과서를 편찬 했다면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 시비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시대는 [신라와 발해]의 [2국 남북시대]라고 명확히 기록하였으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역사는 처음부터 삭제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개국한 고려시대와 고려를 계승한 조선국 역시 중국 대륙에 있었으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여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한반도 속의 소국적 사대역사관(事大歷史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청년 학도들에게 교육했던 것이다.

고려 인종 임금은 우리나라 3황5제의 聖君(성군)을 중국의 역사로 둔갑하고, 폭군을 성군의 역사로 조작한 중국의 사서를 읽어보시고 한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왜곡 날조된 중국의 사서에 대응하는 방책으로 김부식에게 명하여 편찬 된 사서가 곧 오늘날 삼국사기인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가락국은 중국 대륙에서 개국된 사실을 뚜렷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대륙의 호북성 북부와 하남성 남부의 지명을 한반도내의 경기도의 지명으로 얽어 맞추고, 四川省(사천성)과 貴州省(귀주성)과 湖北省(호북성)에 있던 지명을 충청도에 맞추고, 호남성과 호북성의 지명을 전라도의 지명으로 맞추어 백제의 강역 임의대로 추정하였다. 또한 安徽省(안휘성)과 江蘇省(강소성), 浙江省(절강성)과 山東省(산동성)의 지명 일부를 강원도의 지명으로 맞추고, 하남성과 산동성 서북쪽 및 산서성의 일부를 경상도 지명으로 얽어 맞추고, 산서성과 河北省(하북성)의 남부와 熱河(열하)의 지명을 함경도의 지명으로 맞추고 陝西省(섬서성)의 지명은 황해도의 지명으로 맞추고 감숙성과 新疆(신강)위그르 지방을 평안도의 지명으로 맞추고 산동성 서부와 하남성 서부의 지명을 제주도의 지명으로 얽어 맞추어 신라의 도읍지를 경북 경주로 지정하고 백제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을 도읍지로 정하고 고구려는 지금의 평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야국은 경남 김해로 지정하여 고구려,백제,신라,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했던 것이다.

즉 중국대륙의 모든 지명을 한반도 속에 별도로 심어서 중국의 지명이 한반도 속의 지명으로 둔갑하여 삼한(진한, 변한,마한)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가 저절로 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김해의 수로왕능, 경주의 박혁거세능, 김유신의 묘와 각 사찰(절) 등은 후세에 정부에서 유적물로 지정하여 가짜 유물이 진짜 유물로 둔갑되어 역사적 진실을 망각하고 오히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한민족사학의 선구자로 맹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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