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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19   
   1300년전 ‘天主’라고 적힌 기와도 나와




1300년 전 남한산성 자리에선 무슨 일이…
초대형 통일신라 건물터 발굴, 2m두께 벽· 19㎏짜리 기왓장도
나당전쟁 때 세운 요새로 추정
‘天主’라고 적힌 기와도 나와
고대기독교 ‘경교’ 전래나 외국용병의 주둔 가능성도
조의준 기자(광주(경기도)) joyjun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9년 전인 1998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 행궁터 발굴을 시작했다.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했던 곳이다.
하지만 발굴단이 발견한 것은 행궁터뿐이 아니었다. 백제시대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발굴기간이 연장됐고, 2005년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가로 53.5m 세로 18m에 달하는 초대형 건물터가 나왔다. 임금이 머무는 일반 행궁에 비해 무려 3배나 큰 건물이었다. 함께 출토된 기왓장에는 ‘천주(天主)’ 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최근엔 두께 2m에 달하는 엄청난 벽과 하나에 19㎏이나 나가는 국내 최대 기왓장도 함께 출토됐다. 이런 유물들이 속속 나오면서 당초 3년 목표였던 발굴기간은 10년이 됐고, 발굴은 8차까지 진행됐다.

심광주 토지박물관 학예실장은 “경주 왕궁을 빼고는 신라시대의 가장 큰 건물이 갑자기 한강유역 산꼭대기에서 발굴된 거예요. 도대체 무슨 기술로 이런 집을 지었는지…”라고 말했다. 미스터리의 시작이었다.
▲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초대형 건물터의 모습. 뒤로 보이는 행궁이 왜소해 보일 정도의 규모로, 통일신라시대 병기고나 창고로 추정된다. /토지박물관 제공

◆서기 672년, 국운(國運)을 걸고 요새를 만들다

남한산성은 그전에 무엇이었을까. 심 실장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남한산성이 통일신라시대의 주장성(晝長城)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72년(문무왕 12년)의 기록에 따르면,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步)였다”고 돼 있다. 건물터 바닥의 흙다짐을 위해 사용된 숯의 연대를 미국 베타연구소에 의뢰해 측정한 결과 서기 670년에서 880년(신뢰도 95%)으로 나왔다.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

심 실장은 “통일신라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와 싸워 이기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국운을 걸고 주장성이란 요새를 만들었다”며 “둘레가 8㎞에 달하는 초대형 성벽을 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672년은 나당전쟁으로 신라의 명운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을 때다. 장수 고간(高侃)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몰려온 당나라군에 맞서 신라군은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후퇴했다. 그리고 한강유역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주장성을 쌓았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초대형 건물터는 병장기나 군량미를 넣어두는 초대형 병참기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터는 크지만 다른 유물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점이 거주용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군사용 창고로도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최대규모다.

19㎏짜리 세계 최대 기와와 2m 두께의 벽도 이 터를 요새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옛날에는 벽을 뚫거나 지붕을 뚫고 적들이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수창고는 벽을 두껍게 하고, 지붕에 무거운 기와를 얹었다”고 말했다. 중국 낙양성에 있는 병기창 유적도 벽이 두껍기로 유명하다.

적들의 침입에 대비해 신라는 당시 기술로는 절대 뚫지 못하는 ‘탱크’ 같은 창고를 지은 것이다. 19㎏에 달하는 엄청난 무게의 기와를 얹고서도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두께가 2m에 달하는 두꺼운 벽이 무게를 함께 받아줬기 때문이다.
▲ 경기 광주 남한산성 행궁터 앞 건물터에서 출토된 기와. 천주(天主)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토지박물관 제공

◆‘天主’, 하늘의 보호를 요청했나?

이밖에도 미스터리는 많다. 이중 ‘天主’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는 온전한 상태로, 오직 이 두 글자만 새겨진 채로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신대 권오영 교수는 “우리나라 옛 기록에 ‘天主’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드물고, 이는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며 “경교(景敎·고대 기독교의 한 일파)의 신라 전래, 혹은 외국에서 온 용병들의 주둔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7세기 초 중국에 들어온 경교는 수백만 명의 신도를 얻을 정도로 흥성했었고, 신라에도 일부 전래됐다. 실제로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2점의 철제 십자문이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숭실대 김문경 명예교수는 “동양에서 천주는 근대적인 개념인데 어떻게 통일 신라시대 유물에서 이런 단어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경교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따로 연구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남한산성을 치욕의 역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남한산성 자체는 한 번도 점령돼 본 적 없는 숭고한 땅”이라며 “남한산성을 지키고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입력 : 2007.11.27 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