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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3.20   
   [스크랩] 조선의 용문산은 하남성 용문석굴에 있다.


용문산에 대한 역사적 고찰 (2007.10.21)

조선의 용문산은 하남성 용문석굴에 있다.


1. 연구목적

  반도 경기도 용문산을 답사하고, 현장조사와 문헌을 토대로 반도 용문산의 허구성을 밝히고 용문산의  위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지명과 고찰


(1) 용문(龍門), 용문산(龍門山)

반도 용문(면)은 경기도 양평시 용문면으로 되어 있다. 근처에 용문산(1157m)이 있고, 철도 중앙선의 용문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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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반도 경기도 용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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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대륙 중원의 용문산


 

(고찰)

원래 용문은 산서성 영제를 말하는데 , 그곳이 분수가 황하와 합쳐지는 하진부터 위수와 황하가 합쳐지는 영제까지 물이 한가지로 합쳐져 엄청난 수량으로 급물살에 용이 하늘로 오르는 관문이라 칭할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하여 용문이라 했다. 이곳은 황하상류와는 다른 하수를 이루어 옛적부터 홍수가 빈번해  하우의 치수로 유명한 지역이다.
(<
인물로본 한반도 조선사의 허구> Behold This Person(하) 김종윤,

2004.9.15초판. 黎明출판사,27쪽)

그리고 잉어가 여기에 올라오면 용이 된다는
관문이라 하여, 입신출 세의 관문의 이름, 용문에 오른다는 뜻의 등용문이 바로 이곳에서 유래되기도 했다.  용문(면)이 반도의  남한강 중류의 류근처에 있는 것은 한자의 의미로도 안맞고, 현 상황도 안맞다.

용문이 반도라 한다면 경기도 광주쪽, 특히 등용문학원위치(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원3리.)가  더 적당

하다. 왜냐하면 그곳 광주는 반도에 있어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물살이 세고, 대동강을 이루기 때

문이다. 학원의 위치가 용문(면) 위치보다 대체로 낫다.

대륙에서의 용문석굴은  하남성 낙양시 남쪽 13㎞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백거이 묘가 있는 향산과 용문

산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또한 용문산은 길주,하진,영제(용문)를 잇는 산서성 서쪽일대의 산을 뜻하

기도 한다. 이 산세는 호구산,맹문산, 불암산,석산,진악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1910년 이후 반도

내 지명을 모두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대륙의 용문산을 반도로 가져와 경기도 현위치에 용문산이라

 칭했고, 용문석굴근처 향산에  묘자를 붙여  묘향산으로  평안도에 심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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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대륙 하남성의 용문석굴

 


(2) 용문사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라 신덕왕2년(913)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황제 4년(1378)지천대사가 개풍 경

사의 대장경을 옯겨 봉안하였고 조선태조4년 (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수양대

이 모후 소헌황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3년(1457)황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

(1480)초안스님이 중수한뒤 고종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로

 사용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어실

각,노진, 칠성각,기념각,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 선걸스님이 주지로 불사리탑,미륵불을 조성하

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

다.”  기타 지방유형문화재 제 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현재 모셔져있고, 범종각에는 범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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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반도 경기도 용문사 전경도

 

(고찰)

용문사는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 47호이다. 기록에의하면 삼국사기에 신덕왕때는  지진만 일어났다고만

나온다. 경순왕때는 창사했다는 내용은 보이질 않는다. 즉  안내판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전설로

 내려온다고 하는데, 삼국시대는 역사시대이다. 전설이 나올수 없고, 구전도 있을수가 없다. 대륙의 역사

를 반도에 적용하다보니 유래를 확대할 필요가 있어 여러 전설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용문사가 만리대

국 조선의 황족을 위하여 재건한 것 치고는  외모상으로 규모가 너무 작고 초라해보였다. 그 대웅전을 포

함하여 지장전, 범종각등 6개여동이 전부다.  고려, 조선에 나온 용문사 내력은 반도가 아닌 대륙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에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대륙 용문석굴주변에는 2345여 개의 석굴,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있다. 과연 조선의 위상을 만천하에 알리는 표상이다. 용문석굴은 현존하는 종

교, 미술, 서예, 음악, 의료, 건축 등 방면의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다. 따라서 '대형 돌조각 예술 박물관'이

라고도 칭해진다.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굴은  봉선사 석굴이다. 이곳의 불상조각은 온화하면서 우아한 미를 자랑한다

. 이외에 용문석굴의 대표적인 동굴로는 고양동(古陽洞), 빈양동(賓陽洞), 연화동(蓮花洞),약방동(葯方

洞), 간경사(看經寺),만불동(萬佛洞), 잠계사(潛溪寺), 대만오불동(大萬伍佛洞) 등이다

     그리고 반도 용문사에는 임진왜란때 불이 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규모를 늘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부연

설명에 불과하다. 지형으로 볼때도 그곳은 대규모 사찰이 들어설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한편, 일본군은

 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 침투하였기 때문에 불이 날 까닭이 없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부

분의 건물은 1909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특히, 정지국사 부도는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제가 대륙의

 유물을 반도로 옮기면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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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반도 용문사 대웅전                                 그림6=범종각

 


문사정지국사부도및비(龍門寺正智國師浮屠및碑) 보물 제531호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대륙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

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도와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

다. 처음에는 정지국사부도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 부도란 고승의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을 말한다.


(3) 용문사 은행나무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0호          소재지: 경기도 양평시 용문면 신점리 산626-1

“용문사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935)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신라 화엄종의 창시자)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 하여 천왕목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때에는 정3품이상의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있어났을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으며, 예날 어떤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 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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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반도 용문사 은행나무                                       그림8= 용문사 입장권

 


(고찰)

  마의 태자가 반도 개성에서 먼 경상도 경주에 있다가, 신라가 망한뒤 개성과 가까운 양평쪽에 나무를

 심은 것과, 강원도 금강산으로 간 것이 이해가 잘 안간다. 오히려 숭산근처 등봉현에 도읍한 태조왕건을 뒤로 한체로 낙양쪽에서 머나먼 남쪽 땅 안휘성 황산(금강산)으로 가야 이치에 맞다. 의상대사는 주로  낙양쪽에 있다가 당나라(서토지역, 감숙성부근)에 가서 화엄경을 연구하는 등 대륙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반도의 양평에 올 이유가 없다.


은행나무 나이가 1100년으로 마의 태자를 근거로 산정했으나, 불투명하므로 알 수 없는 나이다. 그러나
, 동양의 유실수로는 가장 오래되고 , 키가 40m, 둘레가 11m나 된다.  매우 웅장하며서 건강하며, 힘찬 모습이었다.


3. 결론

 

1) 조선의 용문산은 대륙 하남성에 있으며, 용문석굴이 있는 산이다. 그리고 산서성 영제(용문)일대에 있 는 산이다. 일제때 그곳의 용문산이 반도 경기도로 , 향산이 평안도에 묘향산으로 옮겨왔다. 용문사는  용문석굴이 있는  그곳의 사찰을 말한다. 국내(반도)의 용문사는 1909년 이후에 새로이 건축된 것으로  사료된다.


2) 용문의 위치는 대륙에 있으며 산서성 영제다. 이곳에서 등용문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무기가 용이 되
  었다는 용문이 있는 곳이다.

3)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한반도에 없었다. 있다면 대륙 하남성 용문사에서 찾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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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용문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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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0= 용문사 안내문(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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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 용문사 은행나무 안내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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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 반도 용문산 입구 <용문팔경시> 양창석 작시.  끝.


출처 :대륙 조선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지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