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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07   
   100년 전의 6월

[특파원 칼럼]

100년 전의 6월

올해는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은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일본 외무성이 발행하는 외교전문지 ‘외교포럼’이 6월호와 7월호에 걸쳐 헤이그 밀사사건 100주년 특집 논문을 실었다. 무라세 신야(村瀨信也) 조지(上智)대학 교수가 당시 외무성 전문(電文) 등 미공개 자료를 발굴해 을사늑약 체결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노력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적, 조명했다.

헤이그 회의가 개회된 것은 1907년 6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6월 25일, 고종황제의 밀명을 띤 3명의 사절이 헤이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대법원) 예심 판사 이준(李儁), 전 주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이위종(李瑋鍾) 등이다.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전권 위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처음부터 성공 전망이 없었다.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가 결정되자 곧바로 가쓰라·태프트 협정(1905년 7월 29일)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고, 영국(1905년 8월 12일), 프랑스(1907년 6월 10일)가 뒤를 이었다.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였다.

사절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 나라가 러시아였다. 헤이그로 가는 도중에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고종 친서를 전하면서,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미 대일 협상방침으로 돌아선 러시아 외상은 오히려 “한국의 비상식을 질타했다”고 한다.

희망과 절망,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이그에 도착한 사절들은 투숙한 호텔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필사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우선 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그는 “개입할 입장이 아니다”며 면회조차 거절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및 중국(청나라) 대표도 개별 방문해 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문전박대했다.

이때부터 이위종의 장외(場外) 외교가 시작된다. 당시 그는 20살이었다. 외교관인 아버지(주러 대사 이범진)를 따라 7살 때부터 구미 각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일본의 비도(非道)를 낱낱이 고발했다. “이것이 당신네 기독교 국가의 정의인가.” “귀하들의 만국평화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회담소식지 ‘만국평화회의보’는 그의 일거일동을 크게 다뤘다.

회담장 안에는 못 들어갔지만 그는 구미 언론이 가장 주목한 인물이었다. 프레스센터 초청을 받아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도 했다. 현지 일본 대표는 본국 외무성에 “만장한 청중 앞에서 불어로 1시간 동안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고 보고했다. 청중은 깊이 감동했다. 연설이 끝나자 몇몇이 일어나 지지 발언을 했고, ‘한국을 돕자’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그때 현지에서 ‘밀사’들과 대화를 나눴던 유일한 일본인이 나중에 마이니치(每日)신문 회장을 지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 기자였다. 그는 일본 정부 입장을 옹호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기사로 남겼다.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志士)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안은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3년 뒤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 망국의 과정에서 이들 3인 열사의 움직임마저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더 쓸쓸할까를 한번 생각해 봤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정권현 도쿄특파원 khjung@chosun.com
입력 : 2007.06.0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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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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