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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11   
   6.25 전쟁중 인천상륙작전 동영상.

제10. 대한민국, 조선 2국 남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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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강점에서 해방되었으나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남북이 분할된 상태에서 강대국들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의 맹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뒤에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함에 따라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한반도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처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미국은 단일정부수립의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제기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뒤 미·소양군은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은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남북한총선거는 좌절되었다. 이에 유엔총회에서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므로서 한반도 속의 2국 남북시대가 시작 되었다.

1948년 12월 제 3차 유엔총회는 남한만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므로서 북위 38도선은 제 2 차 세계대전 후 가장 긴장된 냉전체제의 경계선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북한은 소련의 지원에 따라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막강한 군사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강화한 김일성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고취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1950년 1월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D.G.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고, 1949년 말부터 김일성이 소련의 I.V. 스탈린에게 무력침공계획에 관한 지원을 요청해오다가, 1950년 4월 중국의 동의를 전제로 한 전쟁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5월 모택동의 지원약속을 얻어내고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남북통일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이때 남한은 10만에 이르는 병력은 갖추었으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제주도사삼사건·여수순천반란사건 등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한반도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남침을 개시하였다. 이에 한국군은 외출중인 장병들을 즉각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여 응전하였다.

그러나 26일 옹진반도(甕津半島)의 한국군 17연대가 철수하였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의정부(議政府)가 북한군에게 함락되었으며, 27일 북한군의 전차부대 일부가 서울 시내를 장악함으로써, 정부는 대전으로 퇴각하였다. 이어 한강 이북의 한국군이 전원 철수하고 28일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자 28일 서울은 북한군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한편 정부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알렸고,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상임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하는 한편 유엔회원국들에게 남한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는 어떤 원조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27일 미국대통령 H.S. 트루먼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 7 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28일 도쿄[東京]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D. 맥아더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남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파견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남한의 이승만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다. 한편 한국군은 6월 30일자로 정일권(丁一權)준장을 육군총참모장에 임명, 한강 이남 방어선을 재정비했으나, 육군본부가 있던 수원(水原)을 빼앗기자 다시 남으로 후퇴하였다. 1950년 7월 5일 유엔결의에 따라 우선적으로 급파된 미국 제24사단 21연대 제 1 대대가 오산(烏山)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금강으로 후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뒤, 호남 및 경상북도 왜관(倭館)·영천(永川)·포항(浦項) 등지로 나누어 남진해 오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 아래 한국군을 포함시켜 작전계통을 통일하고 미 제24사단, 미 8군 등을 계속 투입, 북한국의 남진속도를 둔화시킨 다음 낙동강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지상군의 증원부대를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해 국지전(局地戰)을 벌였으며, 8월 중순부터 시작한 북한군의 총공세는 9월 초에 이르러 끝났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유엔군의 증원부대가 계속 도착하여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7월 15일부터 맥아더는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 상륙 작전안을 구상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 제 1 해병사단과 제 7 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月尾島)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다.

미국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탈환을 위하여 동진하였고, 미국 제 7 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30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에게 <더 이상의 유혈과 파괴를 없애기 위해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남한지역에 있는 북한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넘었으나, 이때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북진이 참전 목표와 일치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찬반 양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7일 유엔총회는 한국의 통일과 부흥에 관하여 압도적 다수로 새로운 결의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한반도의 통일·독립·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한국전쟁 수행을 위해 6월 25일과 27일에 채택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기초, 유엔군의 행동 및 회원국들의 남한에 대한 원조의 중요성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의 38선 진격이 허락되어 유엔군의 북진도 본격화되었다.

맥아더는 다시 북한에 항복을 권고하고, 유엔에 협력하기를 권하였으며, 이에 불응할 때에는 유엔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동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군 제 1 군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미국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여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실현되는 듯했다. 한편 중공군은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경고하였다. 즉 미군의 북한 진입은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중국은 이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계속된 경고에 대해 미국은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하여 불안감을 갖기는 하였으나, 중국이 본토의 통일을 이룩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타이완문제를 지니고 있는 만큼 한국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맥아더는 조만간 한반도에 평화가 회복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고 1950년 10월 21일 맥아더에게 북한과 중국 동북부지방의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수력발전소나 함경북도 공업도시인 나진(羅津)에 대한 폭격은 금하도록 하여 결국 중국군의 개입을 막지는 못하였다.
10월 24일 중국군은 4개군 약 50만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와 한국군 제 6 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雲山)에서 중국군의 적군에 포위되었고, 이를 구출하기 위한 미국 제 1 기병사단마저도 26일에 포위되어 고전하였다.

11월 24일 맥아더가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하며 방어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29일까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였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수를 개시하였다. 12월 4일 맥아더는 <중국군 100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하였고,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유엔군 12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이 흥남(興南)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중국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이 26일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자, 맥아더는 미국에 재차 지상 증원군을 요청하고 새로운 전략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면전 위험을 경계하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로부터의 유엔군 철수안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한국전쟁의 정전을 위한 유엔 3 인위원회가 구성되어 중국과 접촉했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이 한국전쟁정전에 거부한 것은 당시의 전황이 그들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유엔군을 추격 남진하고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하였고 남한정부와 민간인들은 다시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여 2월 10일 인천과 김포(金浦)를 탈환하고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2월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이때 맥아더는 중국 북동부인 만주지방을 폭격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미국정부는 휴전을 모색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맥아더와 미국정부의 대립은 4월 11일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를 해임시킴으로써 끝났다.